황기선 목사 | Pastor Kisun Hw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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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내용:

황기선은 황봉걸 선교사와 황봉찬 목사 중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선조들의 믿음을 통해 학습된 그의 대가없는 헌신적인 사랑은 비록 주위 사람들에게는 오해와 업신 여김을 받았지만 하나님께서는 기억해 주십니다.

  1. 집안에 3대째 목회자입니다
  2. 첫째 아들이 이제 곧 4대째 목회자가 되기 위해 공부를 시작합니다
  3. 장손과 두번째 손자가 45살쯤 될 때 5대째 목회자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4. 로렌 커닝햄은 기선의 성공을 잘 알고 있었으며 1980년대부터 예수전도단 아마존 지부 총 책임자로 섬겼던 마리오 목사는 황기선을 아마존 역대 3대 최고 선교사로 인정했습니다
  5. 삼성 이건희 회장은 황기선의 선교를 통해 삼성이 국제 무대에서 인정받게 되었다고 이건희 회장이 가장 아끼는 조카를 통해 알려주었습니다. 황기선의 선교를 통해 대한민국이 세계 10-12대 최고 경제국가가 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6. 황기선이 선교한 도시는 브라질에서 다섯번째로 가장 빨리 성장하는 도시가 되었었습니다 이 도시의 급속한 성장으로 인해 그 당시 80%의 지지률을 가지고 있던 룰라 대통령이 방문할 정도로 축복 받은 도시가 되었었습니다.
  7. 세계 선교에 지각 변동을 일으켰습니다. 세계 많은 선교사들은 기선의 선교를 밴치마크해 우물을 파 주기 시작했습니다.
  8. 황기선의 아들은 그 당시 우리나라 10대 재벌들로 부터 모든것을 다 갖춘 사람으로 인정받았으며 조직의 막내로 들어가게 됩니다. 인정받은 부분은 경제적으로 망할뻔한 대한민국을 살린 사람, 대한민국 최고의 추진력과 기획력, 태평양 한가운데도 다리를 놓을수 있는 사람,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꿀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대한민국 대통령도 만나 자신의 필요한 부분을 말할수 있을 정도의 능력이 있었으며, 일본 총리와 중국 최고 지도자와도 친분을 쌓기 시작했었습니다. 미국과 유럽 재벌들과도 친분을 쌓기 시작한 그는 많은 신뢰속에 큰 사업을 맡을 정도로 성공했었습니다.
  9. 후손들은 세계 최 강대국인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10. 대부분의 후손들은 미국 엘리트 그룹에 속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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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기선은 한인 첫 아마존 선교사이자 탐험가이자 모험가이자 항해사입니다. 아골 골짝 빈들과 같이 죽음이 가득한 아마존 밀림도,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죄악으로 가득 찬 도시도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복음을 들고 찾아갔을 때 죽음도 황기선 선교사를 피해 갔습니다. 황기선은 선교를 시작하기 위해 상파울루에서 브라질 최악의 고속도로 BR-319를 지나 아마존 마나우스까지 차로 종단했는데 날씨로 인해 한 달이 지나도 못 도착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6일 만에 아마존 마나우스에 도착했으며 깊은 아마존 정글 안에 숨어 사는 인디언들을 복음화하기 위해 폭이 30km인 강이 있는 곳을 30일 이상 씩 항해했으며 아마존시에서 조차 포기한 우상숭배와 마약과 중범죄와 동성애로 가득 찬 도시를 복음화함으로 브라질에서 다섯 번째로 가파르게 성장한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황기선 선교사의 하나님을 향한 열정과 담대함을 본 많은 아마존 예수전도단 선교사들은 황기선을 끼랑(추장)이라고 불렀으며 그는 아마존 예수전도단 기지 안에서 가장 존경받은 선교사 중 한 명입니다.  

황기선은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다. 영적인 가치를 귀히 여긴 황기선은 자신의 약함과 위기를 깨닫고 하나님께서 베푸실 축복, 그의 도우심을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황봉찬 목사의 신앙을 계승하기를 원했던 황기선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 효도했으며 행복한 가정을 꾸렸지만 이 모든 노력으로는 황봉찬 목사의 신앙을 계승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황기선의 열정을 보시고 젊은 시절 절대로 목사와 장로교 장로가 안 되겠다고 결심한 황기선의 생각을 바꿔 아마존 선교사로 만드신 후 축복하십니다. 황봉찬 목사의 신앙을 계승한 황기선은 아마존에 영향을 가장 많이 준 역대 세명의 선교사 중 한 명이 되었고 그의 후손들은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게 된 황기선

해방 후부터 6.25 전쟁에 이르는 동안 황기선은 그의 아버지 황봉찬 목사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공산당으로 인해 수차례 죽을 고비와 어려움을 넘겨야 했던 황기선과 그의 가족들을 하나님께서는 황봉찬 목사와 장윤찬 사모의 믿음을 통해 항상 구원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황기선의 가족은 절망속에서도 목숨을 다할 때까지 하나님만 바라봤으며 찬양했으며 의지함으로 하나님께서는 항상 동행해 주셨습니다. 황기선 가족의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가까이서 이들의 간구와 기대하는 것들보다 항상 더 많이 것들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6.25 전쟁을 앞두고 북한의 정치 사회는 공산주위 일색으로 되어 버렸고 김일성은 북한 교회에 대한 회유와 탄압에 나섰습니다. 평안도 지방을 포함해 북한 내에서 교회의 영향력이 워낙 컸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교회들은 해방 후부터 6.25 전쟁에 이르는 동안 일제시대때도 경험하지 못했던 가혹한 박해를 받았으며 기독교 탄압은 정점을 찍습니다. 교회 재산 몰수, 성직자 포섭과 감시체제, 기독교인들에게 자행한 세뇌 공작, 성직자들과 지도자들에게 자행한 심문과 납치, 학살, 살해등 대대적인 박해가 자행되었습니다. 신사참배 반대의 중심에 섰던 평안도 교회들은 공산당들의 차원이 다른 폭력과 탄압에 의해 끝내 무너져 내리고 말았습니다.

6.25 전 김일성은 나라를 빼앗고 국민학생에서 대학생까지 무조건 주일날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영화감상회, 야영대회, 운동회등등을 참여하게 했습니다. 이는 학생들의 주일성수를 막기 위해서였으며 반동여부를 탐지해 벌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일곱살 때 국민학교에 입학한 황기선과 그의 친구 그리고 그의 누이 황기복은 주일날은 학교를 결석 월요일이면 여지없이 순번대로 기압을 받았는데 1학년 학생들을 두줄로 세운 후 주일날 학교를 결석한 황기선과 그의 친구를 교단까지 걸어가게 시켰는데 걸어가는 동안 양 옆에 친구들은 발로 차고 주먹으로 때리게 했습니다. 그래도 주일성수를 지키자 학교에 큰 우물이 있었는데 손에 피가 나올 때까지 우물 물을 퍼 내라고 시켰으며 대머리 교감이 황기선과 그의 친구를 불러 운동장 청소를 시키곤 했었습니다. 주일성수를 위해 김일성의 명령에 불복종한 기복, 기선 그리고 기선의 친구는 폭력에 가까운 벌을 받았지만 끝까지 신앙을 시켰습니다.

1947년 5월 평양에서 열린 미소 공동회담에 기독청년 연합회 대표로 참석하려다가 검속된 황기선의 아버지 황봉찬 목사의 옥중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북한을 장악한 공산당을 내쫓고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하나의 대한민국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려다가 일등 반동분자로 김일성에게 잡혀 감옥에 보내졌기 때문입니다. 함흥 감옥소로 간 황목사는 비료공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하는데 온 몸에 독이 올라와 머리카락서부터 온 몸에 털이 다 빠졌으며 감옥소 안에서 전도하다가 붙잡혀서 45일동안 앉지도 못하는 독방에 거의 하루종일 갖혀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당했습니다. 장윤찬 사모는 죽기직전의 황봉찬 목사를 살리기 위해 김일성의 이모의 도움으로 항생제를 구해 매주 기선과 함께 4개의 삶은 계란 노른자들을 으깬 후 첫노른자엔 항생제 두개를 나머지 으깬 노른자 엔 항생제를 한개씩 넣어 총 4일어치의 미숫가루와 섞어 옥중수발을 들어 황봉찬 목사를 살립니다. 황목사는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풀무불에서 나온 것과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서 나온 것을 나는 몸소 체험하였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나에게 ‘죽음을 헤치고 나온 산 순교자’라 불러 주심에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부족한 마음뿐이다.”

1950년 6월25일 6.25 전쟁이 발발한 그날 주일 아침 만기 출옥한 황봉찬 목사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여전히 엄청난 시련을 격고 있었습니다. 황봉찬 목사가 함흥 감옥소에 갖혀 있는 동안 김일성의 외삼촌 강량욱에 의해 재산을 몰수 당해 가족들은 흩어져서 지내야 했으며 황봉찬 목사는 출옥 후에도 여전히 일동 반동분자로 찍혀있었습니다. 황봉찬 목사는 출옥 후 장윤찬 사모와 함께 뿔뿔이 흩어져 있는 세 자녀들을 만나기 위해 우선 자산으로 내려갑니다. 기선은 자산에 사는 황목사의 이부동생집에 기복과 기득은 황목사의 연동 처남 집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출옥 후 가족들은 모두 한자리에 다시 모였지만 북한 내무원들은 일등 반동으로 찍혀있는 황목사가 자산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다시 감옥에 보내려고 찾아다녀 황목사의 이부 동생집에 숨어서 살아야 했으며 나머지 가족들은 북한 내무원들로부터 감시를 당했습니다. 추운 겨울 감시를 피해 피난을 선택하지만 이것도 실패합니다. 장윤찬 사모는 형무소에서 죽기직전까지 고문을 당한 황목사를 돌보기 위해 떠날수 없었으며 기복은 건강 이상으로 떠날수 없어 국민학생인 기선과 기득만 피난을 떠나지만 피난민들과 합류하기 직전 이상한 기류를 느낀 기선은 기득과 함께 다리 아래로 굴러 떨어진 후 다음날 날이 환해진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앞에 가고 있던 피난민들은 김일성의 모략에 의해 모두 죽어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피난민들을 북한 군인들같이 보이게 해 미군의 폭격을 당한겁니다. 이 후 북한군이 미군에 의해 북으로 밀리기 시작하자 김일성은 모든 일등반동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황봉찬 목사의 나머지 가족들을 생매장시킬 땅을 몰래 파 놓았었습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시련속에서도 황봉찬 목사의 가족들은 그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국군을 통해 황기선의 가족을 공산당으로부터 몰살 당하기 직전 이 모든 환란에서 구원하십니다. 황기선의 가족이 공산당에 의해 생매장되기 삼일 전 대한민국 군인과 UN군이 무서운 속도로 북진해 이들을 구출합니다. 9월 하순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한 국군과 UN군은 더 이상 올라갈수 없는 남한 땅끝에 도착합니다. 맥아더 장군은 국군과 UN군이 38선에서 정지하면 인민군은 군사력을 정비해 다시 침략할거라며 계속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트루먼은 해리먼 특사를 보내 맥어더 장군을 경계하고 나섰습니다. 트르먼은 38선을 돌파해 북진하면 중국과 소련이 전쟁에 개입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트루먼은 전쟁이 확대되는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반면 맥아더는 트르먼과 반대로 소련과 중국과의 전면전까지 확대되길 바랬습니다. 그렇게 되면 장제스가 중국 공산당을 무찌르고 중국을 다시 장악할 기회를 얻을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중국과 소련은 UN군이 38선을 넘는거에 관련해 민감한 반응을 보였으며 1950년 7월5일 주은래(전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무원 총리)는 전면전을 준비하라는 스탈린의 전보를 받습니다. 전보 내용은 “만약 미국 군대가 38선을 넘는다면 중국은 육군을 출동시키고 소련은 공군을 출동시켜 북한을 돕겠다”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UN군이 어떻게 결정을 하든 만주까지의 진군을 멈추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트루먼과 맥아더간에 첨예했던 가운데 미국의 입장이 최종적으로 정리가 됩니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38선을 넘어 이북으로의 진격은 허용하지만 소련이나 중국과의 마찰은 금지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UN군, 국군 모두에게 평양 북쪽 청천강까지의 진격을 명령 1950년 10월1일 국군은 UN군 보다 하루 빨리 북쪽으로 진격을 시작했습니다. 38선을 넘어 UN군 보다 먼저 평양에 도착하고 싶었던 국군은 UN군의 기계화 부대보다도 하루 앞서서 북진해 10일만에 평안을 탈환해 황기선의 가족은 모두 죽음 앞에서 구출됩니다.

6.25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알게 된 기선은 스스로 하나님의 축복을 선택합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면 불가능함이 없다는걸 직접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기선은 이 후 주일 성수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 응답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삼형제중 가장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었으며 형제들에게 가장 많이 양보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기는 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상 주기시를 원하시는 분이라는것을 알고 이를 적극적으로 쟁취하려하는 의욕적인 삶을 산 기선은 하나님께서 많은 축복을 주십니다.

숙천읍 교회로 다시 돌아올것을 약속하며 10년 동안 소식이 끊겼던 형을 만나러 남으로

평안도 자산에서 국군과 UN군의 평양 탈환으로 구사일생한 기선의 가족은 또 하나의 기적을 접합니다. 끝까지 하나님만 섬겼을 때 기선의 가족이 가장 원했던 소원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십니다. 10년동안 생사확인이 불가능했던 기선의 형 기오가 남한에 살아 있다는 기적 같은 소식을 듣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보다 가까이서 이들의 간구와 기대하는 것들보다 항상 더 많이 것들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기오형의 생사확인이 불가능했던 10년은 죽음보다 더 괴로운 삶이었습니다. 일제시대 형은 일본인보다 더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강제징용됩니다. 아시아 최고 클라리넷 연주자였던 형은 일본을 대표하는 육군 군악대에서 조선인으로 수석으로 졸업하게되자 이를 못 마땅히 여긴 일본인들은 4등으로 강등시킨 후 싱가폴로 강제징용해 기차 자살 특공대로 사용합니다. 강제징용되어 수많은 죽을 고비를 넘긴 형은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조선인 신분으로 끝내 자유를 얻지만 남한으로 돌아왔을 땐 남과 북이 갈라져 있어 남한에 홀로 남아 생활하게 됩니다.

남한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한 기오형은 급속히 성공합니다.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은 형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름을 받게 됩니다. 광복 후 1946년 1월15일 대한민국 육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제1연대가 창설된 후 군악대의 필요성을 절감 군악대 창설을 추진합니다. 2월15일 군사영어학교1기 출신의 김계원 소위가 조선경비대1연대 군악대를 맡게 되지만 김계원은 곧 전투부대 지휘관으로 발령나서 군악대를 떠난 후 형이 사실상 현 대한민국 육군본부 군악대의 모체의 창설 주역이 됩니다. 군악대 대장으로서 인정을 받은 형은 그 후 이승만 대통령의 군악대 대장이 되었으며 대통령의 모든 행사를 주관하게 됩니다.

형은 국군과 UN군의 숙천 입성 식 후 자산으로 부모를 찾아가다가 뜻하지 않은 큰 부상을 입습니다. 민간인으로부터 국군이 부녀자를 농간한다는 신고를 받고 부녀자를 도와주었다가 돌연 군인들로부터 사격을 받습니다. 형은 부모가 있는 숙천읍교회를 찾아가지만 부모는 자산에 내려가 있다는 소식과 함께 친구로부터 친구의 딸이 과수원에서 군인 세명으로부터 겁탈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형은 3명의 군인들을 제압하지만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고 있어서 얼마 후 보복을 당합니다. 제압 당한 군인 3명이 겁탈하려던 형의 친구집에 총을 들고 찾아가 형의 행선지를 알아낸 후 자산으로 운전병과 함께 차로 내려가고 있는 형의 차를 쫓아와 형의 차를 향해 총을 발포합니다. 위협을 느낀 형이 논두렁으로 뛰어내리지만 다섯 군데 총상을 입고 쓰러집니다. 친구의 딸을 강간하려는 무분별한 군인들을 제압했다가 형은 생명을 잃을 뻔 했습니다.

자산에 있는 기선의 가족은 드디어 10년동안 못 만났던 형을 만나게 됩니다. 형의 부하 대원들이 기선의 가족을 찾아왔습니다. 국군 수방사 군악대 소속인 안영훈 상사와 고기찬 하사가 형이 가족들을 찾아 자산으로 내려오다가 총상을 입고 서울수도육군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걸 알려준 후 국군 수방사 군악대가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갈 때 같이 내려오라는 명을 받고 찾아옵니다. 형 기오가 남한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들은 기선의 가족은 다시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하러 숙천읍교회 들른 후 수방사 군악대에서 제공한 트럭에 타고 형이 입원해 있는 서울수도육군병원으로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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