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강해야 할 부분들:
- 평생 유일하게 할아버지께서 실패하셨다고 창피하셨던 일 역사적 고증을 통해 업데이트
- 할아버지의 전체 삶을 입증할 책을 찾은거 같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곳으로 보내지고 있는데 받는대로 업데이트 할겁니다.
- 큰아버지 (숙천읍 교회) 일본 유학 전과 당시 있었던 일 업데이트
- 브라질에서 있었던 일 (큰 아들과의 재회, 둘째 아들 신학교)
- 사진들 업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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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찬 목사는 온 마음과 정성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했으며 마지막 교인 한명까지 자신의 몸같이 아낀 대한민국 지식인들이 존경한 목사입니다. 일제시대 아시아 지역 대형교회 목사였던 황봉찬 목사는 주기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했으며 평안남도에서 김화식목사와 함께 공산주의와 대항한 목사로서 후대 목사들로부터 산순교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하나님만 섬긴 목사입니다. 김동길 교수는 황봉찬 목사를 모든 대한민국 지식인들이 존경한 인물이라고 알려줬으며 한경직 목사는 황봉찬 목사가 소천했을 때 남한산성에서 아픈 가운데도 가장 먼저 달려와 황봉찬 목사의 하나님의 부르심을 애도한 황봉찬 목사를 누구보다 존경한 목사입니다. 황봉찬 목사는 감정의 굴곡이나 신앙 주기의 변화가 들쑥날쑥하지 않았으며 한결같이 하나님을 꾸준히 섬긴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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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찬 목사가 2살때 순교한 황봉걸 선교사의 유언과 영향력 아래 대형교회 목사로 성장하게 됩니다. 황봉걸 선교사의 유언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한 최영수 사모와 황봉걸 선교사의 헌신적인 순교를 잘 알고 있었던 현대선 목사(Lloyd P. Henderson)와 사무엘 마펫선교사는 황봉찬 목사를 좋은 목회자로 키워줍니다. 미국 목사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황봉찬 목사는 세가지 목회 특징이 있었는데 첫째는 타협없는 말씀증거였고 둘째는 모든 교인들을 똑같이 사랑하는것이었으며 셋째는 철저한 예배 준비였습니다. 황봉찬 목사의 영향력 아래 성장한 숙천읍 교회는 6.25전까지 유년주일학생만 800명이 될 정도로 성장했으며 평안도 숙천은 기독교가 가장 깊이 뿌리를 내렸던 지역으로써 6.25 전쟁 이후 종교인을 색출하고 숙청할 때 가장 많은 피해를 많이 본 지역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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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 10월경에 만주 봉천성 홍경현에서 현대선목사 (Lloyd P.Henderson)와 초년 목회생활을 시작한 황봉찬목사는 교육생활과 함께 주일마다 교포들의 집단부락에 찾아가 주일예배, 전도와 저녁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당시 황봉찬 목사는 홍경현 시내에 거주하고있던 대구 계성학교 교장 현거선 목사의 동생 선교사 현대선 목사의 서기겸 전도사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봄 가을로 현대선 목사를 모시고 각교회를 순행했는데 홍경현에 각 교회와 부근의 회연현, 통화현, 즙안해 둥지까지 순행했습니다. 어떤 교회는 마차로 하루 종일을 가도 다 못가서 중간에 중국인 객점에서 쉴 때가 있었습니다. 중국인 객점이란 주방이 따로 없고 한방 속에서 불을 때고 음식을 만들고 그 자리에서 잠을 자게 되어 있습니다. 보기에도 추하고 어두운 방인데 연기조차 자욱하고 집 지은 후로는한번도 손질을 하지 않아서 컴컴한 천정으로부터 거미줄이 늘어져서 이리 저리 흐느적 거리는 당장 얼굴에 떨어질 것만 같아서 잠도 오질 않고 기분이 몹시 불쾌한 곳이었습니다. 황봉찬 목사는 본국의 화려한 생활을 버리고 순교하기까지 만주에서 온갖 고생을 다 한 현대선 목사의 선교를 보면서 앞으로의 목회 방향을 꿈꾸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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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봄, 황봉찬 목사는 평양으로 나와 숭실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에 졸업하고 계속해서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1933년 졸업하고 그해 10월 안주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34년에 숙천읍교회 위임목사로 임직되어 20년간 시무하였습니다. 사무엘 마펫선교사의 최측근이었던 황봉찬 목사는 학업성적과 황봉걸 선교사의 헌신을 모두 인정받아 사무엘 목사의 주선으로 캘리포니아에 있는 어느 할머니의 도움으로 장학생이 되어 평양신학교를 졸업했으며 졸업 후 다시한번 더 사무엘 선교사의 도움으로 그 당시 담임목사가 없던 평안도 숙천읍교회에 담임 전도사로 시작해 목사 안수를 받은 후 담임 목사로 부임 합니다. 숙천읍교회는 1896년 사무엘 선교사가 세운 교회입니다. 황봉찬 목사의 부임후 가파르게 성장하기 시작한 숙천읍교회는 1937년 유년주일학생 1200명이 들어가는 성전을 순석조로 신축하기 시작했으며 건축이 완공되었을 때 유년 550명 장년 700명으로 매주일 평균 천명 이상이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 지붕은 청동을 씌웠으며 사방 5리가 나가는 교회 종이 있었습니다. 최고 유년주일학교 학생들만 800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한 숙천읍교회는 교회 부설로 양신 국민학교가 있었으며 24명으로 구성된 관악기 오케스트라가 있던 교회입니다. 황봉찬 목사의 헌신으로 영적으로 양적으로 모두 성장한 숙천읍 교회는 신사참배에 굴하지 않았으며 김일성과 최후까지 맞서 싸운 대한민국 대표 교회중 한곳으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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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찬 목사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그리워했던 숙천읍교회는 일제시대 주기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를 반대한 교회였으며 하나님의 예비하심과 황봉찬 목사의 인내로 한번도 핍박을 받지 않은 교회로 성장합니다.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황봉찬 목사의 첫째 아들은 도야마 군악대에 입학해 숙천읍교회 교인들을 신사참배로부터 보호하지만 반대로 아들의 목숨을 두고 신사참배를 반대한 황봉찬 목사에겐 엄청난 연단의 기간이었습니다. 황봉찬 목사의 첫째 아들은 일왕 동생이 교장으로 있는 도야마 국악대에 입학해 평양 경찰서장도 함부로 못하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일왕 동생이 보낸 첫째 아들의 입학서를 받아들은 평양 경찰서장은 숙천경찰서부터 숙천읍교회까지 입학서를 머리위로 들고 올 정도였으며 한번은 일본인 소녀 2명이 숙천읍 교회안에 들어와 무궁화꽃들을 꺽었는데 이를 본 장윤찬사모는 우리나라 꽃을 함부로 꺽지말라며 야단친 후 사과까지 받았는데도 일본인들은 이러한 사실을 알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성공은 신사참배를 누구보다 반대한 황봉찬 목사 입장에선 엄청난 연단이었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이 이삭을 단위에 올려놓고 칼을 내려치는 심정으로 신사참배를 반대했을 겁니다. 하나님께서 황봉찬 목사의 첫째 아들을 예비함으로 숙천읍 교회 교인들은 아무 핍박없이 하나님을 섬길수 있었지만 그는 도야마 군악대를 졸업 후 싱가폴 근처로 강제징용되었으며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지만 돌아왔을 땐 남북이 갈라져있어 10년동안 이북에 있던 황봉찬목사는 첫째 아들의 생사를 모른체 살아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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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찬 목사가 목숨보다 사랑한 평안남도 숙천읍 교회는 김일성으로부터 엄청난 핍박을 받게 됩니다. 기독교에 노골적인 불만을 표출하던 김일성은 1946년에 시행된 토지개혁과 화폐개혁에서 다수의 장로와 목사들의 토지와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으며 평양의 대표적인 교회였던 장대현교회에서 3.1절 기념 예배를 드리는걸 탄압함으로 이에 격분한 3,000여 명의 신도들은 태극기와 십자가를 앞세우고 평양에서 시가행전을 벌임으로 같은 해 3월을 기점으로 북한의 개신교 탄압이 본격화되기 시작됩니다. 김일성에게 재산을 모두 몰수당한 숙천읍 유지(有志)이자 숙천읍교회 수석장로는 월남한 후 황봉찬 목사를 위해 서울에 거주지를 준비해 놓겠다며 안내원을 보내 황목사의 월남을 권하지만 황목사는 숙천읍 교회 교인들만 놓고 떠날수 없다며 오히려 목숨을 걸고 김일성의 종교탄압을 알리기 위해 1947년 5월 평양에서 열린 미소 공동회담에 기독청년 연합회 대표로 참석하려다가 검속되어 1950년까지 4년간 투옥 되었다가 1950년 6월25일 주일 아침 만기 출옥합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뒤 북한에서 17년간 기자로 일한 엘리트 여성 김길선씨(탈북자)는 그당시 숙천읍교회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평안도 숙천은 기독교가 제일 깊이 뿌리를 내렸던 지역으로써 6.25전쟁이후 종교인을 색출하고 숙청할 때 제일 피해를 많이 본 지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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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5월 평양에서 열린 미소 공동회담에 기독청년 연합회 대표로 참석하려다가 검속된 황봉찬 목사의 옥중 생활은 비참했습니다. 김일성의 외삼촌 강량욱을 주축으로 세워진 북한 정권의 권력 장악을 돕는 어용단체인 북조선기독교도연맹 가입 강요에 김화식 목사와 함께 강력하게 반발했기 때문입니다. 강량욱은 이효렴을 장윤찬 사모에게 보내 북조선기독교도연맹에 황목사의 가입을 강요하지만 불같이 화내며 내쫓았으며 그러자 이번엔 강량욱이 직접와 장윤찬 사모만이라도 가입서에 지장을 찍으면 황목사를 출옥시켜주겠다고 약속하지만 이마저도 화를내며 내쫓아버렸습니다. 뜻대로 안되자 강량욱은 황목사를 평양 감옥소에서 함흥 감옥소로 이감 시켜버립니다. 함흥 감옥소로 간 황목사는 비료공장에서 막노동을 시작하는데 온 몸에 독이 올라와 머리카락서부터 온 몸에 털이 다 빠졌으며 감옥소 안에서 전도하다가 붙잡혀서 45일동안 앉지도 못하는 관만한 독방에 거의 하루종일 갖혀 죽기 직전까지 고문을 당했습니다 장윤찬 사모는 이 사실을 가깝게 지내고 있던 김일성 이모에게 항생제 부탁과 함께 알렸으며 교회 권사였던 김일성 이모는 상당히 미안해하며 그 이후 매주 항생제 다섯개씩과 용돈을 주었다고 합니다. 항생제를 얻어온 장윤찬 사모는 4개의 삶은 계란 노른자들을 으깬 후 첫노른자엔 항생제 두개를 나머지 으깬 노른자 엔 한개씩 넣어 총 4일어치의 미숫가루와 섞어 황 목사를 위해 첫 보따리를 준비했으며 그 당시 고급 음식이었던 미숫가루를 간수들을 위해 따로 준비함으로 황목사는 항생제가 든 미숫가루를 먹고 완치가 됩니다. 하지만 만기 출옥 후 집으로 돌아온 황목사의 몰골은 완전히 망가져있어 아무도 알아볼수 없었으며 장윤찬 사모도 황목사가 감옥에 있는동안 내무서원들에게 끌려가 생사를 알지못하던 큰아들을 내놓으라고 해 모른다고 하자 왼쪽 귀옆으로 총을 쏴 고막이 텨져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때까지 왼쪽 귀를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황목사는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간증했습니다 “다니엘의 세친구가 풀무불에서 나온 것과 다니엘이 사자굴 속에서 나온 것을 나는 몸소 체험하였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나에게 ‘죽음을 헤치고 나온 산 순교자’라 불러 주심에 나는 감당할 수 없는 부족한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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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25일 6.25 전쟁이 발발한 그날 주일 아침 만기 출옥한 황봉찬 목사는 그의 가족들과 함께 김일성으로 인해 다시 한번 더 엄청난 시련을 격게됩니다. 황봉찬 목사는 여전히 북조선기독교도연맹 가입 반대로 김일성에게 일등 반동으로 찍혀있었습니다. 함흥 교도소는 보통 9시에 죄수들을 출옥 시켰는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날은 11시45분에 황봉찬 목사를 출옥시켰습니다. 집으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흥남역에 도착했을땐 군인들을 실어날라야하기 때문에 황목사 부부는 탈 자리가 없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갈수 없게된 황봉찬목사 부부는 무거운 마음에 역 기둥에 몸을 지대고 있었는데 그때 빨간차에서 인민군 고위간부가 내리더니 모자를 벗은 후 장윤찬 사모에게 절을 한 다음 “어머니 저를 모르시겠어요?”라고 물어보는거였습니다. 알고보니 그 청년은 황봉찬 목사의 첫째 아들과 오산학교 동창으로서 방학때면 고향 함경도에 갈 차비가 없어 황봉찬 목사 집에서 같이 지내던 첫째 아들 친구였습니다. 황봉찬 목사의 기차표를 살수 없는 사정을 모두 들은 이 북한 고위간부는 매표소에서 표 두장을 받아낸 후 주머니에 있던 조그마한 도장을 표에 찍어준 후 안전히 여행하라고 인사한 후 자리를 떠납니다. 극적으로 기차표를 구한 황봉찬 목사 부부는 황목사가 혹시 기차안에서 불시검문으로 또다시 걸릴까봐 화장실에 숨어있었는데 표 검사하는 승무원이 장윤찬 사모가 가지고 있는 표에 찍힌 도장을 보더니 인민군 세명을 일으켜 세운후 황봉찬 목사 부부가 편안하게 여행할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었으며 어디까지 가냐고 물어봐서 숙천을 거쳐 자산까지 간다고 했더니 표까지 바꿔주었습니다 . 황목사 부부가 숙천을 거쳐 자산까지 가야했던 이유는 황목사가 감옥에 있는 동안 김일성이 황봉찬목사의 재산을 모두 몰수 해 딸과 막내 아들은 연동에서 목회하는 장윤찬 사모 동생과 함께, 둘째 아들과 장윤찬 사모는 자산에 있는 황봉찬 목사의 이부동생집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윤찬 사모는 함경도 교도소에 있는 황봉찬목사를 내조하기 위해 매주 월요일에서 목요일까지 집을 비웠습니다). 북한 내무원들은 황봉찬 목사가 자산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다시 감옥소로 보내려고 찾아다니자 절반은 양철로 절반은 초가 지붕으로 된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황봉찬 목사의 이부 동생이 초가 지붕으로된 천장쪽에 한사람 겨우 누워있을 만큼을 파네 낮엔 그곳에 황봉찬 목사를 숨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연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북한군이 미군에 의해 북으로 밀리기 시작하자 김일성은 모든 일등반동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황봉찬 목사의 나머지 가족들을 생매장시킬 땅을 몰래 파 놓았었습니다. 하지만 이 엄청난 시련속에서도 황봉찬 목사의 가족들은 그 누구도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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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찬 목사는 인생 시련을 만났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하며 순종했을때 하나님께서는 황봉찬목사의 인생을 넘치도록 축복하셨습니다. 수많은 고난속에서도 황 목사는 자신을 핍박하는 자들에게 선으로 대하였으며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았습니다. 장윤찬 사모가 마지막 남은 쌀을 가지고 지붕속에 숨어있을 황봉찬 목사가 다음 날 먹을 주먹밥을 준비하고 있을 때 어떤 청년이 배고프다며 부엌문을 두드려 장윤찬 사모는 가지고 있던 마지막 주먹밥을 이 청년에게 줍니다. 얼마 후 쿵소리가 들려 나가봤더니 쌀 한가마니가 부엌에 던져저 있는겁니다. 얼마 후 또 쿵소리가 들려 나가봤더니 쌀 한가마니가 부엌에 또 던져저 있었습니다. 미군이 자산에 있는 정미소를 폭격하고 있었는데 아까 그 배고픈 청년이 고마운 마음에 폭격을 뚫고 정미소 안에 들어가 쌀 두가마니를 훔쳐나온거였습니다. 폭격이 있은 후 얼마 후 평양은 국군에 의해 수복 됩니다. 이 때 자산 북한 내무소에서 문서를 하나 보게 되는데 일등 반동인 황봉찬 목사의 나머지 가족들을 모두 땅에 생매장시키라는 김일성의 명령서였습니다 . 국군이 3일만 늦었어도 황봉찬 목사의 가족들은 모두 땅에 생매장될뻔했습니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후 국군 수방사 군악대 소속인 안영훈 상사와 고기찬 하사가 황봉찬 목사 부부를 찾아옵니다. 찾아온 이유는 국군수방사 군악대가 평양에서 서울로 돌아갈 때 황봉찬 목사 부부와 어린 동생들을 같이 모셔오라는 황봉찬 목사 첫째 아들의 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일제시대때 강제징용된 황봉찬 목사의 첫째아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으로 돌아와 육군사관학교 6기생으로 졸업한 후 육군본부군악대 창설의 주역이 되어 이승만 대통령과 같이 움직이던 수방사 군악대 군악대장이 됩니다. 하지만 부모를 찾아 숙천을 통해 자산으로 오는 도중 총을 다섯번 맞아 서울수도육군병원에 헬기로 이송되어 첫째아들(황기오 소령)을 대신해 수방사 군악대 대원 두명이 명을 받고 찾아온겁니다. 큰아들의 소식을 접한 황봉찬 목사 식구들은 황목사의 조카(유경숙)와 그녀의 예비 신랑과 함께 큰며느리에게 선물할 예단과 폭격속에서 얻은 쌀 한가마니를 수방사 군악대에서 제공한 트럭에 싣고 서울수도육군병원으로 떠납니다. 부산으로 내려가는 중 다시 돌아오겠다는 인사를 하러 숙천읍교회, 주기철 목사와 김화식 목사의 무덤을 들렀는데 주기철 목사의 무덤은 잘 정비되어있었고 김화식 목사의 무덤은 잡초가 무성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쌀이 떨어졌을 때 쌀을 보내주셨으며 죽음의 문턱앞에 있는 가족들을 위해 국군을 보내주셨으며 잃어버린줄 알았던 큰 아들을 크게 세우신 후 10년만에 다시 만나게 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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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황봉찬 목사에게 가는 곳마다 성전건축하는 특별한 은사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평북 동림교회로부터 동대문구 산정현 교회까지 열한 교회를 건축하게 허락하셨습니다. 1950년말쯤 황봉찬 목사의 첫째 아들은 서울에 머물고 있던 가족들을 위해 수방사 군악대 운전병 박기사에게 부서진 트럭들 부품들을 모아 트럭을 준비하라고 명합니다. 이렇게 완성된 트럭을 수방사 군악대원들이 밀어서 시동을 걸었으며 고쳐진 트럭을 타고 황봉찬 목사 가족은 1.4 후퇴때 한강 다리가 끊어져있어 마포에 있는 고무 다리를 통해 큰아들 매제가 살고 있는 대구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5일 묵은 후 황목사는 식구들에게 거제도로 가기 위해 대구역으로 가자고 합니다. 대구 광장엔 여러명의 목사들과 가족들이 황목사 일행과 같이 거제도로 가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천으로 된 지붕이 있는 짐칸에 탔으며 경부선엔 빨치산들이 숨어있어 경주로 돌아 해운대로 내려갔습니다. 부산역에 도착한 일행은 벽돌로 된 초량교회에서 하루저녁을 묵은 후 그 다음날 아침 배로 거제도 장성포로 이동합니다. 장성포엔 미국 PCA교단에서 목사님들을 위해 마련해놓은 12개의 텐트들이 있었습니다. 거제도 오량리에 교회(오량리교회)를 세운 황목사는 그곳에서 목회를 시작 합니다. 그리고 거제도로 이사한지 2년 후 황목사의 첫째 아들이 경무대가 임시로 부산으로 옮겨 수방사 군악대도 같이 내려왔있었는데 큰아들이 부산으로 나오라고 해서 다시 황목사 가족은 부산 광안리으로 배를 타고 이사를 나옵니다. 광안리로 이사한지 한달 후 군악대 대원들이 찾아와 대장님 집을 지어줘야 한다며 부산시 대연동 146번지에 집(방 2개, 부엌, 조그마한 창고와 집밖에 있는 화장실)을 지워줍니다. 이 집이 지어지는 1달동안 일개소대가 들어가는 텐트에서 지내야 했는데 이 텐트는 바람만 불면 무너지곤 했었습니다. 집이 다 지어진 후 황목사는 이 텐트를 이용해 교회(교회명: 북한교회)를 세웁니다. 나중에 교회 이름을 신흥교회(현 대연제일장로교회)로 바꾼 이 교회 청년부엔 김동길 교수, 김옥길총장(이화여대 총장), 김영덕(박정희 대통령)국무총리등이 있었으며 정확실교수(이화대 사범대학학장)의 어머니와 김동길교수 어머니, 홍양보 아나운서(미국 VOA 방송국)와 방송국 직원같이 대단한 분들이 출석했습니다. 얼마후 미군 중령의 부탁으로 황목사는 미군(미8군 공병대)에서 지원한 대한민국 첫번째 고아원이 신흥교회 부속으로 세워집니다. 다행히 그 당시 영어 잘하는 김홍범집사가 있어서 모든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어느날 서울이 안정을 찾은 후 황목사는 서울에 있는 충정교회(그 당시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충정로 3가 3번지 33호)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얼마후 군악대장으로 있던 큰아들과 식구들도 큰아들이 육군본부 분실장으로 발령받아 서울에 먼저 올라온 식구들과 합세하게 됩니다. 회기동에 큰아들의 도움으로 땅을 구입하고 부산에 살고 있던 황목사의 사촌동생 황병서씨의 도움으로 집을 지은 후 모든 식구들이 모여 살게 되었습니다. 충정교회엔 약 200명정도의 성도가 있었는데 그 중 7명의 성도들이 극심히 황목사를 반대했습니다. 이로 인해 교회가 쪼개지게 생기자 황목사는 7명의 성도들도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면서 사임을 결정합니다. 숙천읍 교회를 잊지 못하고 있던 황목사는 그 후 여러 교회를 섬기다 회기동집에 30명정도의 성도들과 함께 숙천교회를 세웁니다. 얼마후 평양 산정현 교회 교인들과 합세해 동대문구 회기동에 산정현 교회를 세우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황목사의 후손들은 황목사가 세운 11교회의 이름들은 다 알지는 못하지만 황목사의 모범적이고 헌신적인 목회생활이 인정받아 동서울 노회에서는 첫 공로목사가 되었으며 동대문구 회기동 산정현교회에서는 원로 목사로 추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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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봉찬 목사의 삶은 고난의 여정이었지만 하나님의 축복의 여정이기도 했습니다. “사람의 행위가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면 그 사람이 원수라도 그로 더불어 화목하게 하시느니라”는 말씀대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산 황목사는 다른 사람들이 누리지 못한 많은 축북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습니다. 큰아들은 그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클라리넷 연주가이자 대한민국의 발전및 방송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이 되었으며 둘째 아들은 브라질 아마존 한인 첫 선교사로서 아마존 역대 3명의 위대한 선교사라고 불릴정도로 아마존에 지대한 영향을 준 목사이며 막내아들은 여의도 순복음 교회 초창기 방송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주기철 목사와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했으며 목숨을 걸고 김화식 목사와 공산주위를 대항한 황봉찬 목사는 그당시 대한민국 모든 지식인들이 존경한 사람이 되었으며 한경직 목사외 장로교 통합측 목사들이 가장 존경한 목사중 한명으로 추대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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